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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taware> 너의 이름은 OST, Doki piano cover

https://youtu.be/l4O9lB0A9ns

 

 

 

 

 

 

 

너른 들판에 드러누워

내 허구의 세계에 너를 끌어들이곤

달이 질 때까지 함께 있고 싶었어.

/ 향돌, 못한 고백 4

 

 

 

 

 

 

 

* 제목은 시인 박준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의

목차에서 따왔습니다.

 

 

 

 

 

 

 

***

 

 

 

 

 

 

 

  그 때가 봄이었나. 맞네. 지금처럼 봄이었네. 웬 작은 여자애가 불쑥 눈 앞으로 지나가는데, 부딪힐까봐 한걸음 뒤로 물러났거든. 내가 그 때 우유를 들고있었어. 어, 흰우유. 곽에 들은거. 그게 온통 내 교복 위로 쏟아지는 바람에……. 맞아, 그 때도 말이 좀 거칠어서, 내가……. 욕을 툭 뱉었는데 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돌아보는거야. 얼굴은 새하얗고, 머리는 이만큼 길었는데. ……그 봄날까지만 해도 걘 그냥, 그냥 '걔'였지. 친구놈이 지 여친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던…….

  지겹도록 들어온 첫사랑 이야기였다. 입사동기 조연출 고동과 작가 둘, 편집팀 신입 막내만 남은 2차 테이블에서 상훈의 이야기를 듣는건 막내뿐이었다. 술자리에서 누가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 임마. 입사동기에게 핀잔을 먹고서도 눈을 빛내며 재차 묻기에 잔 표면까지 찰랑이는 맑은 술 한잔을 입 안에 털어넣고 이야기를 시작한 상훈은 첫머리를 떼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얼큰하게 오른 취기가 기어이 눈가까지 덥혔다.

 

 

 

  "……조감독님. 우세요?"

  "내가, 내가 걔를 잃어버렸어……."

  "네?"

  "……빈을 잃어버렸어."

  "조감독님?"

  "유수빈……."

 

 

 

  ……봄이었다. 당일 새벽까지 모바일 게임을 하느라 몇시간 자지 못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학교 앞 편의점에서 우유 한 팩과 김밥 한 줄을 사들고 흡사 좀비처럼 느린 손짓으로 입 안에 밀어넣던 차였다. 덩치 크고 재수없는, 익숙한 얼굴이 변함없는 걸음걸이로 지나가기에 남은 우유를 들고 편의점을 나선 상훈은 매끈한 차 한 대가 지나가기에 잠시 멈춰섰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뒷모습에 따라잡기를 포기하고 제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5월을 며칠 앞두니 이른 아침이어도 볕이 따스했다. 절로 흐르는 콧노래를 고개까지 까딱거리며 흥얼거리다보니 흰꽃이 드문드문 핀 교정이 코앞이었다. 보자마자 인상을 쓰게 만드는, 교문 너머의 학교 건물을 바라보다 막 걸음을 떼는데 앞으로 불쑥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눈 앞으로 가볍게 흩날리는 머리칼이 시야를 흐렸다. 짧은 사이 저를 돌아보는 새카만 눈빛이, 온 몸을 둘러싼 새하얀 아침을 온통 밤으로 물들여버렸다.

  퍽. 엉거주춤 뒤로 한 발 물러나다 놓친 우유팩이 마치 눈처럼 방울방울 쏟기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큰누나가 보던 드라마에 그런 대사가 있었는데. 그거 시였나.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부터 땅까지,

 

 

 

  "조상훈!"

  "어? …어어."

 

 

 

  괜찮냐구. 시선을 잡아당기듯이 내려야 보이는 애였는데, 조금 높은 곳에 서있던 탓인지 그저 앞을 보아도. 보였다. 조금 삐쳐올라간 앞머리 뒤로 짙은 눈썹이 꿈틀대며 답을 요한다. 괜찮을걸.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니 안 괜찮아 보이는데, 중얼거림과 함께 손가락 하나가 곧게 저를 향한다. 교복 엉망이잖아. 나 때문은 아니지? 툭하면 놀려대서 그랬나. 선을 두고 묻는 말에 가슴이 쿡, 저려 상훈은 얼른 눈을 내렸다.

 

 

 

  "아."

  "우유 그대로 마르면 냄새날텐데."

  "……그렇지."

  "뭐, 아무튼. 나 때문 아닌거 확실하지? 나 얼른 가야해서. 담에 봐!"

 

 

 

  이미 가버렸는데, 그제야 답을 하듯 웃었다. 새 운동화가 더러워져 실소가 터진게 아니었다. 교복과 시계에 튄 우유방울에 화가 나 웃은 것도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정말 말도 안되는 순간에 상대에게로 온 마음이 기울 수가 있구나 싶어서. 이거 얼빠네, 조상훈 이 새끼.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그렇게 한참을 서서 봄볕 아래 달큰한 우유향에 취했던 날. 그에게로 찾아든 진짜 봄이었다…….

 

 

 

  "야, 조상훈. 일어나. 일어나, 임마."

  "씨……5분만. 아니, 15분."

  "유수빈 직장에서 연락 왔어. 받아봐. ……아프대."

 

 

 

  고동 이 새끼가, 내가 그 이름 꺼내지말라고 했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이불로 둘러싸고 돌아누운 상훈은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와 마찬가지로 까치집을 한 몰골로 휴대폰을 내미는 푸석한 얼굴이 한숨을 짙게 뱉어낸다.

 

 

 

  "지금 동료가 같이 병원에 가 있는데, 다시 들어가봐야된대. 수빈이 휴대폰 비밀번호는 모르겠고, 지문으로 열자니 찝찝하고. 인사과 비상연락망에 네 번호 있었나봐. 관계가 어떻게 되냐고, 병원으로 와줄 수 있냐는데 어떡할래. 받아서 얘기할거냐, 아님 내가 갈까."

  "……어딘지 물어봐라. 금방 간다고."

 

 

 

  쏟아지는 물줄기에도 술은 깰 생각이 없는지, 어지러운 머리를 손바닥으로 쥐어짜듯 몇 번 마사지하고 대충 물기를 털었다. 키는 커도 저보다 몸집이 얇은 고동의 옷이 몸에 맞을리 없었다. 오피스텔로 데려가지 왜 방으로 데려왔냐는 말에 고동은 상훈을 쫓아내듯 내보내버렸다. 집까지 들를 여유가 없었다. 고기를 굽던 연탄 연기향과 몇번 술을 흘린 탓에 엉망인 차림으로 재회하기는 더더욱 싫었지만.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병원 앞으로 오니 한숨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구여친이 아픈데 네가 왜 오냐, 이 구질구질한 구남친 새끼야. 머리를 마구 헝클이고서도 유리문 앞에 서서 슥슥 정리하는 꼴이 말 그대로 우스웠다. 그러고 서 있자니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손을 꼭 붙들고 자동문 사이로 걸어나온다. 곁으로 비켜주며 언뜻 들리는 대화에 픽 웃어버렸다. 너 꾀병이지? 여자애의 물음에 잡은 손을 흔들며 말없이 웃은 남자애는 구원이라도 되는 양 진료비 수납 영수증과 진료확인서를 팔랑였다.

 

 

 

  '야, 조상훈. 너 꾀병이지? 자꾸 거짓말로 사람 놀라게 할래?'

  '진짜라니까. 진짜 존나 아팠다고.'

  '아파서 출석만 하고 튄 애가 이렇게 에어컨 빵빵하고 사람 많은 카페에서 영화나 보고있었다고?'

  '넌 내가 에어컨 빵빵하고 사람 많은 카페로 불러냈는데도 나 아픈 줄 알고 뛰어왔다고?'

 

 

 

  처음 너를 안은 날이었나. 처음 아침을 함께 본 날이었나. 같은 일상을 공유하고싶다고 너를 졸랐던 날이었었나. 네 웃음소리보다 달콤한건 없던 날이었을지도. 봄이 다 지나고, 여름이 와서, 한참 우리가 서로에게 모든걸 내보이던 때에. 기어이 너와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먹고 씻던 때에. 내가 너를 왜 잃어버렸지. 수빈아.

 

 

 

  '네가 한 말, 기억해?'

  '…….'

  '무심해지고, 익숙해지는 날에 깔끔히 그만 두겠다고.'

 

 

 

  아마 지쳐서였을거다. 계속되는 언론고시 낙방에 지쳤고, 자진해서 회사를 관둔 탓에 더 좋은 곳으로의 이직이 불가능했던 아빠의 후회에 짓눌렸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만그만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누나의 아량에 질렸고, 이미 자리를 잡고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연인의 곁에선 불안해서. 카메라 잡고 소리만 질러대는 무식한 인간들 틈바구니에 어떻게든 발 한번 담궈보겠다고 아등바등인 저만 빼고는 전부 잘나고 착한, 더러운 세상. 그 땐 그걸……다 네 탓이라고 미루면 다 해결됐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

  '헤어지기라도 하자고? 야, 유수빈. 너 주위에 잘난 인간 차고 넘치니까 이제 내가 눈에 안 들어오냐?'

  '너 되게 잘났어, 조상훈. 나한테 고백하던 열여덟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한텐 꾸준히 그리고 여전히 멋있고. 근데 너한테 난 안 그렇잖아. 네가 말하던 대로 빛나고, 똑똑하고 다정한 애 아니잖아. 이해해. 초조하고 불안한거. 그럼 기대야 맞는건데, 나한테 기대지는 않고 오히려 밀어내잖아. 자존심 좀 굽히면 될걸 기어이…….'

  '아,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는거냐고! 그럼 내가 계속 너랑 이 좁아터진 방에서 라면이나 끓여먹어야 맞냐? 넌 이미 나 고딩 시절 울 아빠가, 울 엄마가 해내던 일을 척척 해내고있는데 나 혼자 아직도 거지같이 여친 지갑이나 털어먹는걸, 그걸 나더러 견디라고 하는 네가 맞냐고! 기대? 너한테?'

  '조상훈.'

 '지금보다 얼마나 더. 얼마나 더 찌질한 모습까지 보고싶은데.'

 

 

 

  어디서 꽃잎 하나가 날아와 눈 앞을 스치더니 낡은 운동화 앞으로 떨어졌다. 그 뒤로 너는 내 좁은 방을 찾지 않았고, 나는 네 집 앞을 서성이며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는데. 어엿하게 연출자란 이름을 달고, 공중파 심야 시간대의 다큐 프로그램에 이름 석자 올리게 된 3년 남짓한 시간동안 너는 그 회사에서 내가 모르는 순간까지 여러번 아팠을거고, 대리에서 팀장이 되고난 후에는 비상연락망을 통해 내게 안부를 전했다.

  자동문이 쉴새없이 열리고 닫혔다. 학생 때는 쉽게 넘을 수 있었던 문 앞에서, 한참 혈기왕성할 때에는 제 손으로 닫아버린 그 문 앞에서. 상훈을 담배를 꺼내물고 돌아섰다. 다시 열고 들어갈 수 없는 문 앞에서.

 

 

 

 

 

 

 

***

 

 

 

 

 

 

어른?이 된 아이들의 이별도 보고싶어서 적었는데 엉망...

이별이 쓰고싶었으니까 연애 이야기는 최대한 줄였어요...

휘영이와 수빈이의 이별까지 적은 후에는 각 이야기의

2편으로 수빈이 시점에서 적어보고싶은데

이번편 조상훈 캐입에서부터 망한 것 같죠 T_T

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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