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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목소리 들리니> BEN, piano cover

https://www.youtube.com/watch?v=0xrav70Lcmk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있구나

/ 황인찬, 건축

 

 

 

 

 

 

 

 

 

 

 

 

 

 

  잊은건 아니지만 매순간 생각나지는 않았는데. 이따금 가슴에 쿡 박힌 못처럼, 거슬리듯 종종 아프긴 했는데…….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빗방울에 도면에서 고개를 든 준우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변명을 중얼거렸다. 마치 비가 묻기라도 하듯.

  세상이 뒤집어질 듯 아픈 때도 있었지만 실제로 세상을 뒤집어가며 연애를 한건 아니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모든 일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 웃고, 울던 열여덟의 순간에서 만난, 명찰을 바로 달아주고, 잘 살라고 바라주고, 의심 없이 믿어주고, 둘만 아는 신호를 주고받고, 함께 해내고, 견디고, 숨기다 터져버린 마음을 끝내는 전했고, 함께하는 매 순간이 벅차 죽을 것 같았던, ……그 애.

  창 위로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물이 꼭 도면 위로 구르듯 진한 그림자를 남겼다. 그 모양을 손끝으로 따라 움직이던 준우는 책상 바로 아래 서랍에 넣어두었던 크로키북을 꺼냈다. 겉표지 아래쪽의 긁어낸 듯한 흔적을 보자 가슴 어딘가에 박힌 못이 또 아파온다.

 

 

 

  '……뭐라고 쓰는거야?'

  '우유. 최준우, 유수빈.'

  '……우유.'

  '너 이거 꼭 나 줘야된다? 몰래 나 그린 값.'

 

 

 

  여름이면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이 더운 바람에 뒤채던 교정 한켠의 벤치에서, 나무 테이블에 팔이 쓸릴까 걱정돼 바라보고있자면 쏟아지는 햇살처럼 맑게 웃으며 머리칼을 넘기던 작은 얼굴이 숱한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이걸 꺼내 연필을 움직였는데. 꽤 오래 펼치지 않아 뻑뻑해진 스프링이 작은 소음을 내며 열람을 허락했다. 당장 일주일 안으로 제출해야하는 과제 위로 팔꿈치를 기댄 준우는 첫장부터 천천히, 아주 오래 시선을 두고, 겨우 다음 장을 눈에 담았다.

 

 

 

  '아, 여기가 네 방이구나…….'

  '어, 좀 지저분하지. 그, 정리한다고 한건데, 어차피 혼자 살기도 하고…….'

  '불 켜고 자면, 온 동네에 네 방만 높고 환하겠다.'

  '…….'

 

 

 

  침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푹신한 요와 얇은 이불이 깔린 매트리스 위에 앉아 웃던 얼굴이 있고,

 

 

 

  '최준우, 이거 간 좀 봐봐.'

  '진짜 내가 해도 되는데…….'

  '빨리. 먹어봐. …어때?'

  '솔직하게 말해도 돼?'

  '맛없구나.'

  '완전 최고. 진짜.'

 

 

 

  자리를 비운 엄마 대신 녹색 기름이 둥둥 뜬 엉성한 미역국을 끓여 밥을 챙겨주던 뒷모습이 있고,

 

 

 

  '……준우야. 불 끄고 자볼래?'

  '……너도 없어질까봐. 무서워.'

  '내가 네 불빛 할게, 그럼. 형광등도 좋고, 가로등도 상관없어.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을게. 그러니까,'

  '…….'

  '저거 끄고, 나 봐봐. 같이 자자.'

 

 

 

  이마와 뺨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잠결에 걷어내며 달콤한 숨을 오물거리던 옆모습이 있었다. 모두 연필로 그려 어느 부분은 시간을 탓하며 희미하게 바랬고, 또 어떤 부분은 손길에 번져 흐려졌지만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당장 헤어지는게 아쉬워 울던 고등학교 졸업식날과 같은 캠퍼스를 거닐 수 있어 다행이라고 손을 맞잡던 대학교 입학식날, 예술대에서 그 먼 경상대까지 시간 맞춰 아슬아슬하게 뛰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던 점심시간과 마지막 수업시간, 영화관 맨 뒷자리에서 남몰래 뺨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아쉬움이 짙어 너무도 긴 밤을 보낸 날도. 채 2년이 안되지만 꼬박 면회를 와준 군대에서의 시간과 도서관이며 자취방 할 것 없이 시험기간이면 함께 야식을 먹고, 공부를 하고, 과제를 해내며 틈틈이 마주보고 웃던 그 모든 날이 전부 노트 안에 그대로 있었다.

  툭. 마지막장으로 넘기자마자 허벅지 위로 떨어진 검고 얇은 머리끈 하나. 위한다는 마음 하나로 몸이 먼저 움직이던 어느 여름 오후, 아주 조그만 콩알같던 그 애가 단정히 묶어넘긴 머리와 붉어진 두 뺨이 눈 앞에 선연해진다.

  ……우리, 왜 헤어졌더라. 유수빈.

  마지막이 희미했다. 복학하자마자 깨달은건 재능 있는 사람들이 전부 저를 앞서고 있다는 것과 누구의 지원없이 홀로 기회를 잡아야하는 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현실감의 복귀였다. 준우는 경상대로 달려가지 못했고,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벨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과실 창 밖을 내다보면 그 애가 서 있었다. 무거운 전공서적을 끌어안은 두 팔 위로 이미 다 녹아버린 커피를 끌어안고있는 얼굴이 반갑기보단 번거로울 때가 차츰 늘었다. 삼십분도 내기 아까워 자와 연필을 들고 머뭇거리다 내려가면 환히 웃던 얼굴이 점차 굳었고, 서운함을 쌓고 또 쌓던 인내는 결국 한꺼번에 타올라 눈치채기도 전에 재로 식어버렸다.

 

 

 

  '나 엄마네 회사 워싱턴 지사로 인턴 지원했어.'

  '…….'

  '갑자기 듣는 것 같아서 당황스럽겠지만, 말할 시간을 안주길래.'

  '수빈아,'

  '잘 있어, 최준우. 이 말 하려고 왔어.'

  '…….'

  '잘 살아, 준우야. 넌 나처럼 누군가의 그늘에서 크지 않아도 충분히 잘할거야. 잘해왔고. 난 아직 혼자 서는데 성공 못했지만, 넌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자고, 먹고, 학교도 잘 다니고……마지막은 이렇지만, 내 인생에서 아주 찬란하고 예뻤던 모습으로 기억될거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존재감 있게. 잘, 살아. 최준우.'

 

 

 

  그 애가 주문했던 메뉴가 원래 차가웠던가. 빈 앞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잔이 식어 마치 얼음에 데인 듯 화들짝 손을 치우던 주인에게 엉망이 된 얼굴로 겨우 인사를 하고 돌아왔었지. 그 추운 겨울날, 가슴 아프고 먹먹하게 불을 지펴두고 떠난, 내 청춘. 내 첫사랑.

  노트를 덮고, 머리끈을 눈 앞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손이 우뚝 멈춘다. 투둑, 도면 위로 동그랗게 빗물이 떨어져 잉크가 번지는데도 준우는 그 자세 그대로 앉아 한참을, 열여덟 어느 비 오는 날 감기 걸릴까 두려워 겨우 두 손바닥만큼의 비밖에 막아주질 못했던 과거의 저로 돌아가 비를 맞았다.

 

 

 

 

 

 

 

 

 

 

 

 

 

 

비 오는 날마다 수빈이를 떠올리는 준우가 보고싶어서

깨작대다 드디어 완성한 글 T_T 다음편은 수빈이 시점에서

써보고싶은데 사실 휘영이나 상훈이 편도 쓰고싶어서

오래 걸릴 것 같아요......준우수빈 휘영수빈 상훈수빈 다

좋아요, 여러분 열순 본방사수 T_T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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