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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령공주 OST piano cover
되도록 피하려 했던
낭만이었다, 고 변명하며 나는
흐드러진 꽃을 내밀었다.
/ 느린
***
"……오랜 시간 기다려온 정인을 마중나온 사내와,"
네 하얀 얼굴을 보면 여지없이 그 날이 떠오른다.
"……."
네 기억 속에는 담기지조차 못했을 그 날을 나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운명. 허락되지 않은. 허나 언제고 바라왔으니 단 한 번만. 이렇게.
"그의 팔에 제 몸을 기대고 따스한 찻집으로 향하는 여인 흉내를 내잔 뜻입니다."
내 늘 상상만 하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가, 함께.
***
덕춘을 처음 본 건 8년 전 이즈음의 겨울이었다. 동경에서 함께 공부를 했던 친우의 부친상을 전해듣고 막 제물포에 발을 디딘 그는 정신없이 달려나가는 소년 무리에 어깨를 치였다. 작게 혀를 차며, 바닥으로 떨어진 얇은 은테 안경을 주워들어 마저 걸음을 옮기던 원맥은 다시 멈춰서야했다. 뒷춤이 허전하다했더니, 저를 치고 지나간 무리는 소매치기였던 모양이다. 두터운 코트를 무엇으로 찢어 틈을 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명색이 총을 쥐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한다는 사내가 인기척 하나 느끼지 못한 것이 수치스러워 그저 코트를 벗어 팔에 둘렀다.
"동경은 따스할지 모르나 이곳은 봄이 와도 늘상 바람이 차. 벌써 잊었나?"
"잊긴. 잃었을 뿐이야."
마중 나온 친우의 얼굴 앞으로 북 찢어진 코트를 펼쳐보이니 슬픔이 가라앉아있던 얼굴에서 날 것의 웃음이 터져나온다. 좋은 일 하다 돌아가셨다한들 이리 박장대소하면 아버님께서 섭섭해하실텐데. 원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거둬내는 손가락은 여즉 눈가에 머물러있다.
"해선생, 자네 자격 박탈이야. 어? 조국땅 밟자마자 주머니 털렸단 이야기 퍼지면……."
"김선생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저들끼리 선생, 선생하며 부르던 것은 동경에서부터의 습관이었다. 일본땅에서 조선땅으로 자금과 화약, 지령같은 것을 들여오는 운반책을 처음 맡았을 때부터 이따금 누군가의 머리통을 향해 폭약과 총구를 겨누는 지금 이 순간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선생이라 부르며 비폭력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 일을 견뎠다. 대의를 위한 것이라해도 사람의 목숨을 앗은 날은 결코 쉬이 잠들 수 없었다. 뜨끈하게 데운 독주를 병째로 삼켜도 얼굴에 튄 핏물의 짙은 내는 지우기 힘들었다.
지치는 순간이 잦았던 지난 날들보다야 훨씬 성장한 두 사람이었다. 잃어버린 소년 시절이 이따금 찾아온다, 지금처럼. 서로의 머리를 툭툭 치며 장난질에 시동을 건 두 사람은 경성행 열차가 잠시 정차해있는 역까지 연신 웃으며 뛰었다. 전부터 친우에게 힘으로는 단 한번의 예외없이 밀렸던 원맥이 항복의 의미로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보인다. 그제야 뜀박질이 느린 걸음으로 바뀌었다가, 멎는다.
추위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대합실 바로 바깥에 천막을 치고 국밥을 파는 노포로 들어서니 양이도 더러 섞인 내부가 한기를 못 견디는 투덜거림으로 자못 소란스러웠다. 나라 뺏긴 설움도 못 풀어내는데 추위 견딜 방도도 우리 같은 놈들에겐 없으니 살 맛이 안 난다, 살 맛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림에 한마디 보탠 친우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원맥은 그의 곁에 몸을 굽혀 앉고 실금이 간 안경을 꺼내 썼다. 건네받은 국밥은 건더기가 제법 실한, 값어치보다 훨씬 질이 좋은 모양새였다. 뜨끈한 국물을 서둘러 한술 뜨니 안경에 김이 서린다. 흐린 시야를 두고 한 입 삼키려는데 와장창,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약하게 흐른다.
"돈 대는 날인거 잊었어?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게 벌어먹어야되냐고. 응?"
찬물이었다. 추위에 부르튼 손이 뻣뻣하게 굳어 어설프게 말린 주먹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국밥이 끓는 한쪽 구석의 곁으로, 천막이 채 바람을 다 가리지도 않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짚으로 그릇을 닦던 작은 두 손이 분노로 파드득 떨리고 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면 말 그대로 일이 귀찮게 된다. 이를 어쩐다……. 애꿎은 숟가락만 꾹 쥔 채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여있는 패의 난동을 지켜만보던 원맥은 노포 주인인 듯한 여자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지자 숟가락을 내던졌다. 설거지를 하던 아이가 울지 않으려 입술을 악 물고 넘어진 여인에게로 다가간다. 사내의 억센 손길이 아이의 팔을 잡아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원맥은 앞서 일어난 친우가 다짜고짜 패의 우두머리격으로 보이는 사내의 광대에 주먹을 꽂아넣자 한숨을 뱉으며 도로 앉았다. 불같은 저 성격 어디 안갔구만, 김수홍이.
"다같이 먹고살기 힘든데 누가 투정질을 이렇게 요란하게 해대. 밥맛 떨어지게."
그 다음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패들은 쭈볏거리다 정신 못 차리는 제 우두머리를 끌고 달아났으며 수홍은 재빠르게 곁의 테이블에 올려져있던 국밥을 제 바지에 부었다. 순경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들어서서 마주한 광경은 '조심 좀 합시다, 거……칠칠 맞아서 장사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 투덜거리며 옷자락을 털어내는 수홍과 연신 사과의 말을 뱉는 계집아이의 모습이었다. 저들 나라 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도로 나가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시는 시늉을 한 원맥은 노포 안이 잠잠해지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으세요? 이런 일 한두번 아니죠, 아주머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따님이 어째 바로 장단 맞춰주셔서 순경들 눈도 피하고."
방금 전까지 연기를 하던 아이로는 보이지 않을만큼, 어리고 말간 낯 위로 삽시간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고된 삶을 더 이상 연명할 필요도, 의미도 찾지 못한 표정. 그 얼굴이, 제 어미인 듯한 여인을 마주할 때만 생기를 갖는다. 조막만한 얼굴 안에 가득 들어찬 검은 눈이 원맥을 선 자리에 붙들어놓았다. 긴 머리칼을 틀어올려 모자 안으로 욱여넣고, 추위에 터진 입술을 낡은 목도리에 감춘 행색이 안쓰럽다. 단지 그 때문일 것이다. 단 한번의 마주함으로 눈길 가는 곳마다 검은 눈망울이 밟히는 이유. 과거의 저와 닮은 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수홍은 국밥값을 받지 않겠다는 주인에게 돈을 거의 내던지듯 쥐여주고는 종종 들를게요, 어머니! 붙임성 좋게 인사까지 하고 원맥의 팔을 잡아끌다시피 해 대합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터진 주먹을 내려다보는 그에게서 복잡한 대합실 전경으로 고개를 돌린 원맥이 먼저 입을 연다.
"몇 번 가본 집인가보네."
"이 주변 패들이 다 저모양이거든. 양아치 새끼들……."
"물불 안가리고 달려들다간 이 일 오래 못하게 될거야."
"자네도 자리에서 일어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전에 숟가락부터 던졌었나?"
"……."
"야, 우리 해 선생 성격 안 죽었어. 응."
웃는 얼굴이 눈 앞으로 스쳐지나다 저만치서 흐트러진다. 다시 검은 눈동자. 그 안에 맺혀있던 어둔 빛이 이제 한치의 의심없이 저를 향하고있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찬물에 정신없이 터져있던 손등이 이제는 차건 쇳덩이를 쥐느라 굳어있다. 문양이 고운 자기 찻잔이 원맥과 덕춘의 앞에 하나씩 놓인다.
"수홍 그 자는, 여전합니까."
"아. 두 분이 친우사이라 하셨었죠. …예. 여전하십니다. 여전히 불같고, 일이며 식사며 가리지 않으시고."
너는 모르는, 그 날의 기억에 나는 없고 너와 그만 있는. 하여 나는 마음 속으로 바라기만 했던 이 순간마저……상념을 해치는건 덕춘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선생, 아까부터 계속 넋이 먼 곳에 계십니다. 어디 불편하신지……. 한 손을 들어 말을 끊고, 입꼬리만 올려 웃은 원맥은 따뜻한 찻잔을 손가락으로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연정놀음은 오늘 이 순간이 마지막이어야지.
"천천히 마셔요. 오늘 이덕춘씨 임무는 이게 끝이니까."
***
1년은 아니지만 거의 1년 가까이 버려둔 (._. ) 동틀 녘 서쪽의
2편입니당......그리고 아무도 없었다ㅋㅋㅋㅋㅋㅋ
아 뭐 혼자 만족하려구 연성하는거니까요! #쿨한척
1편을 읽고 오시면 더 수월하게 이해하실 수 있어요.
원맥이 덕춘을 알고있던 이유에 디테일을 좀 더해보았습니다.
......개연성을 말아먹었을지언정 쓰고싶은 장면은
악착같이 써냈어요. 차 마시는 덕춘이를 앞에 두고 과거
회상하는 해원맥 << 을 쓰기위해 2편을 시작했는데
앞뒤로 멍멍이소리가 잔뜩이네요......그래도 봐주신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T_T #하트
+ 인과 연 블루레이 예판을 하더라구요 ~,~ 일본에서는
곧 인과 연 개봉을 하구요! 저는 3편이 나올 때까지
맥춘존버단의 자리를 지키렵니당......함께하실 분 언제나
@becomewindy 로 오세요 :)
상단 BGM 표기 확인 후 들으며 읽으시면 더 찰떡같답니다! #복붙
무단 수정 및 복사, 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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